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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장 미셸 바스키아, 짧지만 강렬했던 예술가

by 블래터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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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셸 바스키아의 청소년 시절

1960년 바스키아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 출신 회계사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바스키아는 어릴 적부터 사물을 관찰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바스키아는 예술에 대한 재능성뿐 아니라 열정과 예술혼이 타오르는 아이였습니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바스키아가 그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바스키아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작품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이혼을 했고 어린 나이에 상처가 컸던 바스키아는 17살에 집을 떠났고 학교에도 적응하지 못하여 길거리의 세계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SAMO 결성과 예술계의 데뷔

바스키아는 17세부터 친구 알 디아즈와 세이모(SAMO)'라는 크루를 결성했습니다. 세이모는 same old shit (흔해빠진 것)의 줄임말로 바스키아와 친구들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들은 스프레이, 마커, 오일 크레용을 가지고 뉴욕 소호 거리 외벽을 도화지 삼아 낙서 그림을 그리는 그라피티 아트를 했습니다. 사회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담은 그라피티는 주목을 받게 되었고 바스키아를 세상에 알리는 신호가 되었습니다. 유명세를 타자 바스키아는 더욱 유명해지길 원했지만 함께했던 디아즈와는 의견이 달라 세이모는 해체가 되었습니다. 해체된 후 거리에는 세이모는 죽었다'(samo is dead)라는 낙서가 남기면서 그들이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앤디 워홀과의 만남

1980년대 초반,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과의 만났고 바스키아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앤디 워홀은 당시 팝아트의 교황으로 불리며 대중 미술과 순수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반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하고 있던 선구자였습니다. 첫 만남은 우연히 앤디워홀을 본 바스키아가 자신의 그림을 강매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앤디 워홀은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바스키아를 자신의 스튜디오 팩토리에 자유롭게 출입하게 했으며 전폭적인 지지를 했습니다. 그의 재력, 인지도, 마케팅 실력을 이용해 바스키아가 예술신에 라이징 스타로 만들었습니다. 워홀의 지지와 협력은 바스키아에게 큰 기회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덕분에 바스키아의 그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에 팔리게 되고 그의 작품은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예술계의 스타로 발돋움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바스키아의 작품은 소더비 경매에서 앤디 워홀의 기존 기록을 뛰어넘는 최고 가격을 달성하며 미국 아티스트 중 최고가로 작품이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앤디워홀과 바스키아는 함께 많은 것들을 나누며 활동하며 깊은 관계를 쌓았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관계로 여러 소문들과 루머들이 넘쳤고 바스키아를 괴롭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1985년 뉴욕에서 대규모로 공동 전시를 개최했고 예상과는 다르게 혹평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들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1987년 앤디 워홀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바스키아는 큰 시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비극적인 죽음과 바스키아의 독창적인 예술

앤디워홀이 죽은 후 얼마 안 되어서 바스키아 역시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1988년 27살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짧았던 예술가의 생애에도 불구하고 바스키아는 그만의 독창적 작품들을 남기고 현대 미술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인종, 계급, 자본주의 등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을 던졌습니다. 이러한 문제들과 당시 뉴욕의 전반적 사회상을 반영하며 비극과 유머가 있는 풍자적 그림을 그렸습니다. 바스키아의 시그니처처럼 그려졌던 왕관 모양 또한 아티스트 흑인등 인권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강렬한 색채와 형태를 사용하고 독특한 그만의 에너지 있는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회자되고 있으며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의 예술은 앞으로도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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