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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앙리 마티스 야수파의 거장

by 블래터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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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파의 선구자 앙리 마티스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는 앙리마티스는 20세기 야수파 화가입니다. 1869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원래부터 미술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법률을 공부하던 사람이었는데 1891년 20대였던 마티스는 병상에 누워 있다가 우연히 접한 그림 그리기에 큰 매력을 느끼고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미술을 시작한 앙리 마티스는 초반에는 고흐와 고갱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후기의 그림과는 달리 어두운 색채를 주로 사용하였고 주로 건조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 후기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앙리 마티스는 그림에 과감한 색채와 모양을 더해가며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갔습니다. 그 후 조지 쇠라와 폴 시냐크의 영향을 받아 색과 빛에 대해서 더 세밀히 연구했고 점묘법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점점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던 앙리 마티스는 자연의 색을 무시하고 감정대로 색을 표현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모자 쓴 여인(1905년)으로 아내 아멜리에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야수의 형상을 그렸다는 비판 또한 있었지만 색채의 해방이라는 야수파가 탄생이 되었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야수파의 선구자로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야수파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 그대로의 묘사를 해야 한다는 강박된 사고를 깬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시도와 그림에 대한 탐구

앙리 마티스와 20세기의 천재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는 경쟁자로서 서로에게 많은 동력이 되었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야수파로 주목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그림에 대한 탐구를 이어갔습니다. 새로운 영감을 받기 위해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등을 여행했습니다. 여행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되었고 더욱 다채롭고 화려한 색감과 패턴 등을 만들어 내며 앙리 마티스만의 정체성을 확고해 나아갔습니다. 오달리스크(1920년)등 다양한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암에 걸리게 되었고 후에는 휠체어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작품 활동에 지장이 생긴 앙리 마티스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예술을 이어 나갔습니다. 종이를 오리고 색칠하여 조합하는 기법인 페이퍼 컷아웃 방식으로 또 새로운 예술 세계를 확장해 나아갔습니다. 컷 아웃 기법으로 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블루누드 작품도 컷 아웃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단순한 형태와 단순하지만 강렬한 색감으로 아름다운 작품들을 많이 선보였습니다. 이렇게 조각, 판화, 삽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앙리 마티스만의 예술세계를 펼쳤습니다.

앙리 마티스의 영향

앙리 마티스는 20세기 예술의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선의의 경쟁자 파블로 피카소와는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피카소가 마티스의 작품을 일부 모사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덧입혀 입체주의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마티스의 탐구적인 면과 작품활동을 지켜보며 피카소 또한 동력을 얻고 발전해 갔습니다. 두 거장을 서로 지속적인 교류를 하였고 존중하며 성장을 도모했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죽음 직전에 자신의 작품이 피카소 작품과 함께 있으면 초라해 보인다고 피카소 작품과 함께 전시하지 말아 달라는 겸손한 말을 남겼습니다. 피카소는 자신의 화가 인생의 토대가 되어준 사람이 앙리 마티스라고 전하며 그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영감이 되었는지 알게 하는 말들이었습니다. 후 세대의 마크 로스코 또한 마티스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1954년 마티스는 숨을 거뒀습니다. 노년에도 젊은 화가들의 작품을 탐구하고 끊임없이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마티스는 화가로서의 재능뿐 아니라 인성으로도 찬사를 받았습니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앙리 마티스는 시작도 그러했고 노년에도 자신에게 한계를 두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했습니다. 그의 그림을 향한 끝없는 탐구 정신은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을 주고 있으며 그 결과로 탄생한 아름다운 색채의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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